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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과 관계된 지나온 작은역사를 살펴봅니다.
또한 역사 속의 오늘 어떤 사건 사고들이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02월 25일의 발자취 어제의발자취 | 오늘 | 내일의발자취
미전향 장기수 우용각 석방 (1999)
세계 최장기 미전향 장기수 우용각씨가 1999년 오늘 자유의 몸이됩니다.

동료 장기수 7명과 함께 대전교도소를 나서는 우용각씨 !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정부의 석방조치에 환영의 뜻을 밝힙니다.

평북 영변 출신인 우용각씨는 지난 1958년 간첩으로 남파됐다가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41년동안 독방에 수감돼 세계인권단체의 주목을받아왔습니다.

대전교도소 정문앞에는 <민주화추진 가족협의회> 회원들이 나와 축하를 보냈고세계 각국의 취재진들도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정부의 이번 특별 사면 조치로 대구와 전주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미전향 장기수 17명도 함께 석방됐습니다.
14대 김영삼대통령 취임식 (1993)
1993년 오늘 !

14대 김영삼대통령의 취임식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거행됩니다.

1992년 12월 민자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서 민주당의 김대중후보와 국민당의정주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 !

취임선서와 함께 신한국창조와 진정한 민주주의시대의 개막의 천명했습니다.

김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부정부패 척결에는 어떠한 성역도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국민들은 32년만에 출범한 문민정부가 개혁과 변화에 앞장설 것을 기대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 합의 (1991)
마르코스 전필리핀 대통령 망명 (1986)
1986년 오늘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

20여년동안 필리핀을 지배해온 마르코스의 사진이 발에 밟히고 찢겨집니다.

보름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정선거 문제로 국민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르코스는 대통령에서 물러나 부인 이멜다등 가족들과 함께 해외 망명길에올랐습니다.

마르코스가 망명한 뒤 대통령 후보에 나섰던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국민들의 환호속에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북한 공군 이웅평 대위 귀순 (1983)
1983년 오늘 ! 오전 10시 30분

중공제 미그 19기 한대가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습니다.

조종사는 북한공군 28살 이웅평 대위 !

이웅평 대위는 북한의 통제된 사회에 염증을 느껴 황해도 해주에서 비행훈련도중귀순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대위는 귀순직후 우리공군에 소령으로 입대했고 공군대학에서 교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미군-베트남군 후에市 탈환 (1968)
베트남 동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후에市 !

1968년 오늘 시내 중심가에서 미군가 베트남군이 북베트남과 치열한 전투를벌입니다.

후에시는 북베트남군의 대대전인 공격으로 약 한달전인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됐습니다.

미군과 베트남군은 25일간의 격렬한 전투끝에 마침내 후에시를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투로 후에시으 5부늬 4가량이 폐허로 변했고 3백여명의 시민이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을 잃은 시민들은 배에 몸을 싣고 낯선 곳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교황 바오로6세 주교 서품식 (1965)
1965년 오늘 교황바오로 6세가 26명의 신부들에게 주교 서품식을 거행합니다.

예수의 12제자를 의미하는 주교에 대한 임명권은 교황의 교유 권합니다.

진보적인 교황이라고 일컬어졌던 바오로 6세는 의자에 앉아서 서품식을 거행하던종래의 관습을 타파했습니다.

교황자신이 교단 아래로 내려와 신부들에게 주교로서의 권한을 부여했습니다.ㅣ

주교는 담당교구안에 여러명의 사제단을 이끄는 교구의 책임자로 신부에 대한 서품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미국 흑인 고교생 수업거부 (1964)
1964년 오늘 !

미국 시카고시에 있는 하이드파크 고등학교의 흑인 학생들이 교실밖에서 시위를 벌입니다.

학생들은 자신들도 백인이 다니는 학교에 다닐 권리가 있다고 외치면서 수업을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백인이 다니는 학교의 시설이 자신들의 학교보다 월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1955년 흑백 격리교육이 위헌이라는 연방법원 판결후에도 미국의 많은 주와시에서는 여전히 격리교육을 실시해 흑백갈등이 계속돼왔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화 (1948)
1948년 오늘 !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혈 공산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쿠데타의 주역은 공산당 서기장 크레멘트 고트발트 !

고트발트는 1921년 체코 공산당을 창당했고 1946년 선거에서 공산당이 제1당이 되자 총리를 지내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당이외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코트발트를 대통령으로 추대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한민족의 공적 이등박문 사살 (1909)
1909년 10월 26일, 드디어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중근은 오전 7시경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는 9시에 하얼빈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하얼빈역 플랫폼 하얼빈 역에는 벌써부터 러시아 군인들과 환영객 들이 많이 나와서 이토 히로부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역 안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오전 9시쯤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들어와 멎었다. 얼마 후, 러시아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일본 총영사(總領事)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렸다.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 찻집에서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군 의장대를 사열한 뒤, 환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군대 뒤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쏠 기회를 노렸다. 안중근 은 이토 히로부미가 10보 정도 떨어 진 거리에 왔을 때, 재빨리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순간, 안중근은 자기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일행중 의젓해 보이는 사람 들을 향해 3발을 더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 던 하얼빈 일본청영사가 가와 가미 도시히코, 비서관 모리 야스지로, 남만주 철도(南滿州鐵道)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때, 러시아 헌병 들이 안중근을 덮쳤다. 안 중근은 '코레아우라! (대한 만세)'라고 외친뒤 순순히 체포됐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는 곧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 처치를 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국에 이어 만주(滿州)를 집어 삼키려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손에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곧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동경 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등의 호외가 쏟아져 나왔고, 전세계가 떠들썩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환호를 보냈으나 한국, 중국의 친일파들은 매우 당황했다. 중국 사람들 은 안중근 의사가 마치 자기들의 원수 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당시중국의 국가 주석 이었던 원세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찬양하였다.

안중근 의사 만 (安重根義士輓)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圓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 년을 가오리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 것은 단순히 하얼빈 의거 때문만은 아
니었다. 썩어 가는 중국이 일본,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의 침략을 막을 길이 없어 막막
해하고 있을 때, 잠자고 있는 중국인들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화가 르느와르 출생 (1841)